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쟁쿠르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및 영향 ==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다. 알랑송 공작,[* 알랑송 공작은 전투 도중 [[헨리 5세]]에게 돌진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글로스터 공작을 쓰러트린 뒤 헨리 5세와 결투를 벌였다. 헨리 5세의 왕관에 달린 작은 꽃무늬 장식을 쳐내는 등 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제압당했는데, 그는 포로로 사로잡힌 뒤 면갑을 열자마자 한 광포한 잉글랜드군 기사 한 명이 휘두른 도끼에 맞고 사망했다.] 바르 공작 에두아르, 브라방 공작 앙투안 등 [[공작(작위)|공작]] 3명, 드뢰 백작[*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 그랑프르 백작, 느베르 백작, 루시 백작, 바르 백작, 보데몽 백작, 블라몽 백작, 포켐베르 백작 등 [[백작]] 8명, [[남작]] 1명이 전사했다. 당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 직전인 1413년 아르마냑파가 수도 파리에서 정변을 일으켜 부르고뉴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상황이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귀족이 죽어버린 까닭에 아르마냑파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이었으며,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전사자 중 이름 있는 인물로는 [[헨리 5세]]의 [[당숙]]인 '''뚱보''' [[요크 공작]]과 [[서퍽]] 백작 정도였다. [[요크 공작]]은 전투 도중 넘어졌다가 또다른 시체에 깔려 [[질식사]]했다고 한다. [[헨리 5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또한 헨리 5세를 죽이려 달려든 알랑송 공작을 막다가 허벅지 뒷쪽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에 수비대를 남기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군비를 재정비했으며, 1417년 8월 노르망디 서부에 상륙하여 캉을 확보하고 점령지를 늘려갔다. 이때 프랑스는 내전 중으로, 부르고뉴파가 수도 파리 주변의 위성도시를 하나 둘 무력으로 점거하며 파리를 에워싸기 시작하여 아르마냑파가 궁지에 몰려 있었고, 잉글랜드군의 진출에 대응할 수 없었다. 1418년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점령하여 아르마냑파를 도살하면서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부르고뉴파도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별 도리가 없었던 관계로 1419년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던 [[루앙]]이 함락되어 노르망디 전역이 영국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부르고뉴파는 구적과 화해하고, 거국일치를 시도코자, 도주한 왕세자([[도팽]]) [[샤를 7세|샤를]]이 이끄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왕세자가 협상장에서 거하게 뒤통수를 치고, 부르고뉴파의 우두머리인 부르고뉴 공작을 참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 내전의 원인이 부르고뉴의 무외공 장이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자신의 행동을 그대로 돌려받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발루아 왕실과 철천지 원수가 된 부르고뉴파는 아예 헨리 5세와 손을 잡아버렸다. 부르고뉴파가 여전히 파리 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결국 부르고뉴파가 이끄는 프랑스 정권은 왕세자 샤를을 호적에서 파버렸으며,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의 결혼,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나오는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트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파리에서의 얘기였고, 부르주에 있던 왕세자 샤를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부칸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 휘하 7,000명의 스코틀랜드병을 기반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다. 잉글랜드로 돌아갔던 헨리 5세는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북프랑스를 정리한 뒤 남진하던 도중 병을 얻어[* 병명은 [[이질]].]아들인 [[헨리 6세]]를 보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헨리 5세는 죽기 전 자신의 큰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을 섭정으로 임명했는데,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휘하느라 잉글랜드에는 잘 들르지 못하고, 작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이 잉글랜드 내의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베드퍼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은 형제간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다투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글로스터 공작이 자고 일어나면 사고를 치면서,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까지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부르고뉴 공작의 영역권이었던 에이노와 홀란트를 침공하여 부르고뉴파의 뒤통수를 치면서 팀킬을 하기까지 했다. 왕세자 샤를을 잡고 전쟁을 끝내려면 본격적으로 남침을 해야 했으나, 이렇게 수뇌부에 문제가 컸던 탓에 베드퍼드 공작은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없었다. 1428년, 결국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대대적인 교통정리를 하고 돌아온 베드퍼드 공작은 본격적으로 프랑스 왕세자 샤를을 토벌코자 전열을 정비하고 남침했다. 원래는 아키텐과 북프랑스를 연결코자 앙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왕세자 샤를이 있는 부르주를 노리고 오를레앙과 루아르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잔 다르크|한 처녀]]가 나타나고...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잉글랜드군이 [[노궁]]을 사용했고, 이것이 판금 갑옷을 관통할 만큼 강력한 투사무기였다는 고증 오류, 혹은 왜곡된 내용이 알려져왔다. '''실제 잉글랜드군의 주력은 장궁이었고''', 서양식 [[쇠뇌]]인 [[노궁]]은 오히려 프랑스와 [[제노바 공화국]]의 용병들이 애용했기에 실제 전투 양상은 프랑스 / 제노바 노궁병 vs 잉글랜드의 장궁병이었다. 게다가 노궁도 갑옷을 그리 쉽게 뚫는 무기가 아니었다. 영국에서 널리 쓰이는 [[손가락 욕]]인 '손등이 상대 쪽으로 향하게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행위'는 이 전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카더라]]가 유명한데, 딱히 증거가 없어 요즈음에는 현대에 만들어진 속설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V_sign#As_an_insult|영문위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